첫발제
 laopassana  | 2007·09·26 11:26 | HIT : 4,971 | VOTE : 453 |

아래층 소음으로 인한 수면권 침해에서 벗어나고자 방을 옮기고, 두달도 쓰지 않은 휴대폰을 분실했으며 내 평생 한번도 앓아본 적 없는 조갑함입증에 시달리는 등 그간의 요상한 징후를 어떤 식으로 읽어내려가야 하는가 많은 고민을 했다. 왜냐하면 첫발제를 앞두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긴장하고 궁지에 몰릴수록 비논리적이 되어가며 온갖 현상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이 지닌 오랜 습성 혹은 본능인 듯하다.

어쨌거나, 날은 다가왔고, 닥치면 하게 돼있다는, 불후의 격언을 등에 업고 그냥 해치우고 말았다, 뭘?

한 페이지 혹은 두 페이지에 이론가들의 에세이를 정말이지 너무나도 간단하게 정리한 이전 발제자들의 형식을 빌리자니 도저히 내 안에서 용납이 안 되고 완전 새로운 형식을 제시하자니 시간은 촉박하고 해서 정성과 주장이 담긴 나만의 발제문을 작성하기로 결정하였다. 물론 발제문 이외에 나만의 '스크립트'를 만드느라 이중노동을 감수한 것은 당연.

토픽은 루카치의 유명한 물화이론과 계급의식에 관련된 부분.

사이드와 스피박은 언제나 수강제한 인원을 훌쩍 뛰어넘는 자신의 대학원 수업을 듣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기위해 수강 자격 인터뷰를 매번 보았다고 한다. 기준은 그들만의 것인지라 까다로울 수도 있고 억울할 수도 있고 납득하기 어려울 수도 있었을 것. 어쨌든 현재 내 비평이론 강의를 담당하는 그 교수는 사이드와 스피박의 수업을 운좋게(?) 들을 수 있었던 학생 중의 하나였으며 앞으로 나와 괜찮은(?)  관계를 유지할 여지가 보이는 인물이 되실 듯하다.

미국과 맑시즘...어찌보면 물과 기름처럼 따로 노는 듯 보이는 그림이다. 유럽이나 아시아, 아프리카에 미친 영향력에 비추어보면 맑시즘이 미국에서 누리는 지위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자본주의가 최고도의 형태로 발달한 나라이며 세계마당에서 남부러울 것 없는 주도권을 쥐고 있는 나라이니만큼 현실 변혁에 대한 강렬한 필요성을 느낄 수가 없었을 테니 자연스레 맑시즘은 많은 사람들 곁을 파고들지 못하고 일부 상아탑 안에 주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정된 발제가 시작된 후 나는, 주로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났던 그간의 발제형식과 달라서 그런지, 데리다와 프로이트를 다루었던 지난 시간에 끊이지 않았던 학생들의 이야기가 눈에 띄게 줄어 들었음을 깨달았다, 물론 뒤늦게이긴 하지만. 하지만 교수는 약간 신이 난 듯 보였고, 내겐 공치사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는 격려와 칭찬을 해 주었다.

관념론, 역사의 주체, 물화와 소외, 합리주의 등등의 개념이 대체 자본주의와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 혼란을 겪는 학생들에게 교수는 아주 열정적으로 쉬운 예를 들어가며 설명을 해 주었고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차이에 대해서는 아예 일어난 채 강의실에 있는 다양한 물건을 활용하며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그는 학생들에게 "주옥같은" 루카치의 글을 한문장 한문장 반복해 읽히고 그것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기존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나머지 수업을 진행했다.

보통 수준으로 다루고 넘어갈 것이라는 내 최초의 예상을 뒤집는 교수의 반응에 난 많이 놀랐으며 또 조금은 안도의 한숨을 쉴 수가 있었다. 그제사 난 그가 1주일에 한 이론가라는 원칙을 깨고 두주에 걸쳐 루카치를 다루는 이유도 대강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했던 만큼 그리고 준비했던 만큼 많은 '발화'는 하지 못했지만 첫발제를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돼 저으기 홀가분하다.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오기 직전 교수는 내게 환하게 웃으며 "Thank you" 한마디를 던지고 사라진다. 땡큐라...아주 간단한 말인데 해석이 잘 안된다. 뭐가 고맙단 말인가...?

그렇다면, 저도 감사합니다.

이제 몸이 슬슬 풀리는 것인가?^^;;

finching 첫 발제를 무사히 잘 끝냈음을 축하!! 루카치가 첫 발제였던 게 다행이네요. 미국의 맑시스트란 거의 '모순어법'처럼 들리고, 개중엔 좀 골때리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일단 더불어 얘기하기엔 그런 양반들이 편할 듯. 얘기 통할만한 놈이 하나 나타났군, 이라고 생각해서 'Thank you'라고 한 거다...라면 좀 과도한 해석일라나?^^

07·09·26 13:58 삭제

laopassana 오늘 과사무실에 들렀다가 그분을 마주쳤는데, 다시 한번 "Thank you"를 건네시고는 이번엔 그 이유를 설명해주시더라구요.

무사히 끝내려고만 했는데, 예상치 못한 그분의 반응에 좀 당황한 상황입니다요. 그분의 레이다에 걸려 든 이상 앞으로 그 기대치에 부응키 위해 고생 깨나 하게 될 거라는 부담감이 마구마구 팍팍~!^^;;;

07·09·27 05:59  

calvin 나도 Thank you다. 잘 해 주고 있구나! ㅋ

07·09·27 22:57 삭제

laopassana Thank you, 라 말해 주니 나도 Thank you 요. Thank you 시리즈?ㅋ

07·09·28 06:29  

pillowsopher /포옹. 씨익...

07·09·29 05:36  

laopassana 누구와...? ^^;;;

07·09·29 11:05  

fCdfhPXh vOfANUx

10·09·15 16:07 삭제

     
  Grading [431]  laopassana 07·10·04 4688
  또 한번의 이사 [406]  laopassana 07·09·15 4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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