캬라멜 마끼아또
 laopassana  | 2010·09·11 07:46 | HIT : 2,343 | VOTE : 199 |
금요일 오후 마지막 강의를 마치고 나니 일주일간 누적되어 온 긴장이 스르르 풀린다. 내일 저녁 때쯤이면 다시 들이닥쳐 일주일여를 괴롭힐 테지만, 최소한 반나절 혹은 하루 정도는 이러한 부담감과 스트레스로부터 해방인 셈이다.

화목금 영작문 강의는 오후 두시 반 시작이라 점심을 챙겨먹기가 다소 애매한 시간이다. 강의 준비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할 수밖에 없는 초짜 강사라 즐겁게 점심을 먹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보니, 결국 50분 수업을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얼마나 허기진지 깨닫게 된다. 다른 날에는 뒤이은 대학원 수업 수강으로 인해 대충 때우고 넘어가지만 오늘 같이 일주일의 마지막 수업을 마치는 날엔 약간의 쉼표를 찍을 만한 여유가 있어 교내 '별다방'으로 향한다. 세시 반이면 귀가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고 그렇다고 마냥 놀러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달달한 캬라멜 마끼아또 한 잔 가지고 오피스로 돌아와 허기진 배도 달래고 약간의 해방감도 만끽하며 전후좌우를 요리조리 살펴보는 일이 슬슬 의식으로 굳어지는 중이다. 첫주는 워낙 정신없이 지나가 놓쳤지만, 지난 주부터 시작된 '금요일 오후엔 마끼아또와 함께'가 아마도 주중행사로 자리매김하지 않을까 싶다.

강의가 거듭될 수록 아주 조금씩 긴장도 풀리고 학생들의 얼굴과 표정들도 하나 둘씩 들어온다. 열 여덟명 중 한둘을 제외하면 얼굴과 이름도 매치시킬 수 있게 됐다. 아이들은 대체로 조용한 편이지만, 대부분의 수강생들은 이 대학 신/편입생인데, 신입생 치고는 글을 꽤 잘 쓴다는 인상을 받고 있다. 60퍼센트 정도의 학생들이 공학 전공자들인데 과제로 내준 문학작품 감상문의 수준들이 상당하다. 물론,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more than" 과 "more then"을 헷갈려 하고 "definitely"를 "definattly"로 소리나는 대로 쓰는 등등 철자법에 약하거나 '쿠~~울'한 학생들도 있긴 하다.

또 하나 재미난 사실이 있다면 그건 운동선수 학생과 기본적인 학업 수행능력의 비례관계인데, 한국에서는 대개,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만 비추어보아도, 운동을 하는 학생이라고 하면 책읽기나 글쓰기와 거리가 먼 것으로 이야기되거나 그렇게 손쉽게 '분류'되곤 하지만 여기서는 상황이 좀 다른 것 같다.

한국에서 운동을 하는 학생들은 수업을 대부분 빠지거나 가끔 들어오더라도 수업과는 별개로 자신만의 '할 일'을 하며 학창시절을 보내다 대학을 가게 되고, 수업에 관한한 대학에서도 중고등학교 때 생활이 반복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언제나 열외되어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지난 빙햄튼에 있을 때부터의 경험으로 이야기하자면, 학교를 대표하는 선수로 활동하는 이곳의 학생들은 시합이 있는 당일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수업에 빠짐없이 들어오고 과제물도 꼬박꼬박 제출할 뿐 아니라 글쓰는 수준도 기대 이상이다. 현재 강의를 듣는 학생 중에는 중고교 모두 '올스타' 플레이어로 활약한 이 대학 미식축구선수가 있는데, 거구의 그가 지닌 모범적인 수업태도도 그러하지만, 실질적인 그의 과제수행 능력은 많이 놀랍다. 짤막한 에세이를 써도 교재를 넘어선 작가와 작품을 인용해가며 자기주장을 펼치는데, 그냥 공부만 하는 다른 일반학생들과 비교해봐도 상위에 오를만한 뛰어난 글쓰기 능력을 지니고 있다. 올스타플레이어 출신의 부담감은 어디에 모셔뒀는지, 대체 언제 운동하고 책 읽고 공부하는지 나중에 기회되면 물어볼 생각이 들 만큼 인상적이다.

물론 예로 든 이곳의 학생들이 전부 글쓰기에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 발생한 결과라 할 수도 있지만, 이보다는, 일반화의 오류에 빠질 각오를 한다 하더라도, 조금 거칠게 일반화를 시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단순비교를 하기란 많이 어렵긴 하겠지만, 우선적으로는 두 나라의 중고등학교에서 대학입시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입장의 차이, 즉 큰 틀에 대한 견해 차가 존재할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운동선수에 대한 한국식 '올인'주의, 즉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다면 나머진 전부 괜찮아, 라고 합리화하는 마인드도 큰 작용을 하지 않나 싶다.

어찌 생각해보면 두 요인이 모두 하나의 사회적 의제 혹은 분위기와 관련이 된다고 할 수 있겠는데, 즉 대입을 교육의 종착역이라 치환하는 공간에서는 기본적으로 공부와 운동이 양립하기가 어렵고, 있다 하더라도 그 수명이 얼마나 될지는 짐작이 쉽게 갈 것이다. 반면 대학입학 유무가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라고 여기고 대입에 대한 압박감이 상대적으로 덜한 사회나 공간에서는, 오히려 운동을 수많은 학업 혹은 교과목 중의 하나라 생각하고 '즐기듯' 병행해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항상 무엇으로부터 쫓기며, 무엇엔가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사회가 어쩔 수 없이 가질 수밖에 없는 슬픈 현상이라 가슴이 아프긴 하지만 나름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배경이 있다고 그렇게 위로를 해야 하는 건지 어찌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마끼아또 한 잔을 참 오래도 마시면서 별 생각을 다해본다.


finching 간혹 영문과 전공 수업에 '체교과' 학생들이 들어오곤 하는데, 대략 외국에서 살았던 경험이 조금 있어서 '영어' 관련 전공이면 수업 듣기가 좀 낫지 않을까 싶은 얇은 생각에 들어오는 것이 보통이었지요. 요즘은 영문과 학생들이면서도 영문학 수업엔 무관심한 '영문과 체육특기생'(? 졸업하고 나선 어디 가서 영문과 나왔다고 말하기 어려울 듯한...그런 부류의 학생들을 일컬어 저 혼자 지은 말...^^;;;)이 점점 늘어나서 그런지, 아니면 '체교과'에 뭔가 변화가 있어서인지, 아주 가끔 읽는 능력 쓰는 능력도 좋고 과제물도 괜찮아서 A+를 줄 수밖에 없는 체교과 학생이 들어오곤 합니다. 뭐 하는 학생이며, 어떤 생각을 하면서 체교과에 다니고 있을까, 좀 궁금해지기도 해요.

별다방의 캬라멜 마끼아또...웬만한 점심 식사 뺨치는 칼로리를 자랑한다죠. 그래도 금요일 오후니까...^^

10·09·13 15:16 삭제

laopassana '체교과' 학생들은 최소한 '교육학' 전공에라도 발을 들여놓고 있어 그러지 않을까 싶은데요. 네, 그 '영문과 체육특기생'들 저도 좀 알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선 제가 좀 부러워했더라는...ㅋㅋ 그나저나 스무명 정도 되는 학생들 상대하기도 이렇게 벅찬데, 오륙십명 넘는 학생들 대상으로 강의하시는 선생님 앞에선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앗, 칼로리양 확인하는 걸 깜빡했네요. 그래도 점심 굶고 마시는 것이니까, 괜찮겠죠 뭐.^^;

10·09·15 10:04  

정연식 저도 수업이 12시 45분이라 아침은 대충 시리얼로 때우는데, 수업 마치고 office hours 하고, 페다고지 수업듣고 집에 오면 6시쯤 됩니다. 그때 인터넷으로 예능프로그램을 멍..하니 시청하며 풀린 긴장감과 허기짐을 못이겨 폭식을 하는데.. 그순간은 참 "행복"한 것 같습니다. 제 수업에도 Paris, Texas에서 온 미식축구선수가 한 명 있는데, 맨 뒤에 앉아 딴짓하던 쩍벌남이었던 첫 인상과는 달리 글 실력도 평균 이상은 되보이고, 토론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하더군요. 걔네 집안에서 자기가 대학문턱을 처음 밟아본 사람이기에 꼭 대학을 무사히 졸업하고 싶단 말에... 어깨를 토닥토닥 해주었드랬죠. 티칭과 대학원 수업을 병행하시는 형, 대단하십니다!! 곧 겨울방학이 오겠죠~

10·09·19 04:22 삭제

laopassana 그래, 언제부턴가 집에서 홀로 밥먹을 땐 '유재석강호동'이 없으면 쪼까 허전하더라구.^^;; 너도 티칭하며 시험준비하며 가열차게 지내고 있겠구나.

티칭하며 여러가지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같다. 나중에 돌아봤을 때 학생들 기억에 어떻게 남게 될지도 신경이 쓰이고, 내가 배움을 받았던 여러 선생님들도 오버랩되고 그러네. 암튼 쉽지 않은 영역이다. 고맙다. 계속 화이팅하시고, 은정에게도 안부전해주공~!

10·09·2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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