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어 하나의 온전한 뜻과 그 유래를 파악하기 위해 반나절을 투자해 본 건, 어릴 적 철학을 공부한답시고 각종 개념어들과 씨름하던 때를 제외한다면, 아마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주인공은 명사, preterite.
녀석을 만난 건 미국의 민족-국가 정체성 형성에 관한 논문을 읽던 중이었다. 일단 앞뒤 문맥으로 대강의 뜻을 헤아려 본 후 정확한 정의를 담아두기 위해 온오프상의 각종 사전을 뒤져보았으나 전부 '과거(의),' '지나간,' '이전에 일어난,' '과거시제,' 등등 과거와 관련된 뜻 일색이다. 원하는 답을 사전에서 찾을 수 없다는 다소 황당한 상황에 이르러 이번엔 검색엔진을 활용해보기로 한다. 다양한 예문을 통해서 이미 추측했던 뜻이 맞았음을 확인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이 단어의 정의와 그 유래를 꼭 육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던 나는 마침내 때 맞춰 등장한 오피스 동료에게 조언을 구하기에 이른다.
바로 대답하기가 어려웠던지 사전 찾아봤냐고 묻길래 나는 속으로 이 친구도 해결사는 되기 어렵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OED에서도 답을 못 찾았어?"라고 한번 더 물어보는 것이었다.
OED는 한국에 있을 때 몇 번 검색하려고 접속했다가 회원제로 운영된다는 것을 알고 일찌감치 머릿 속에서 지워버렸던 옥스포드 영어사전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학교 서버를 통해 접속하면 언제든 이용가능하다는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고 동료의 제안대로 OED를 통해 검색해보니 세 번째 항목에 내가 어림짐작하고 원하던 뜻이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었다.
preterit(e)
3. Theol. A person not elected to salvation by God.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정확한 뜻을 파악하고 나서도 무언지 모를 찜찜한 기분이 한동안 가시지 않는 것이었다. 단어 하나로 인해 하루 스케쥴이 보기좋게 일그러져서일까? 성경 공부를 좀 더 많이 해 둘 걸 하는 후회부터 왜 진작 OED 사용을 떠올리지 못했을까하는 자책까지 여러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찬찬히 생각을 해보니 이 찜찜함은 비단 이런 이유로 인해서만은 아니었다. 원인은 이 말이 지닌 문화역사적인 의미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어느 한 문명 혹은 국가를 세우고 유지하는 데 일개(?!) 종교적 신념과 교리가 그토록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참 대단하다는 '의문'을 시작으로, 저렇게 단순한 선악관과 구원/저주(타락)의 논리로 세계를 이해하고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그런지 신기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다시 이 신기함은 결국 안쓰러움을 동반한 불쾌함으로 변하게 되었다.
저런 단순하고도 순진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그간 서유럽 문명이 지구공동체에 끼친 사죄불가능한 해악과 민폐를 떠올리니 참 기분이 나빠졌다. 기독교 신을 섬기지 않는 다른 문명을 싸잡아 미개한 야만인들로 분류해 이들에게 '선의'를 베풀고, 또한 이들을 '교화'한다는 미명 아래 타인의 재산과 자유를 회복불가능한 수준으로 마음껏 유린해 온 그들의 오랜 제국주의 역사를 마주하니 기분은 점점 더러워졌다. 아울러, 아직까지도 세계를 우리/좋은편과 저들/나쁜편으로 나누어 지구촌 거의 모든 곳에서 열심히 위대한 '미션'을 수행하고 있는 여전한 미국의 사회국가적 물적토대의 강고함에 이르러서는 더할 수 없는 깊은 한숨이 밀려 나온다.
대문자 'God'의 개념을 모르거나 믿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 'preterite'이라는 단어가 아예 뿌리내릴 필요가 없는 그런 세상에서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보기를 바라는 건 욕심일까? 정녕 살아생전에 그런 날을 만나볼 수는 없는 노릇일까?
전망은 어둡기만 하다. Oh, my god~!
|
짐 [3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