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년
 laopassana  | 2011·09·24 07:33 | HIT : 2,294 | VOTE : 416 |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간절기마다 연례행사로 치르는 알레르기 안과질환 및 이빈후계 동반 증상들과의 사투가 잦아들자 이제 아침저녁으로 가끔 한기가 느껴지는 완연한 가을로 접어들었다. 개강 후 5주가 지났고 6주차 수업과 강의준비를 하다 문득, 그러나 업계(?) 진출 후 처음으로, 아 이래서 연구년이 필요한 것이구나, 정말 맘놓고 하고 싶은 공부만 줄창 할 수 있는 시간은 언제쯤 찾아올까, 등등의 미련한 생각을 해보았다.

업무 및 노동 강도 그래프의 정점을 일찌감치 찍고 좀 서둘러 가파른 내리막길로 '하산'하고자 세 과목 수강 옵션을 택했는데, 역시 예상대로 만만치가 않을뿐더러 예상치 못한 일도 발생하고 나니 몸도 마음도 지쳐만 가는 것같다.

생애 최초 철학과 대학원 수업 수강으로 초반에 수업 내용과 방식에 적응하느라 약간 힘들었던 것을 제외하면 수강하는 수업은 모두 관심분야라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런데, 의외의 복병은 놀랍게도, 별 준비 없이 비슷한 과제물과 내용으로 대충(?) 하면 별 문제없을 것으로 여겼던 영작문 강의였다. 1년간 쌓인 내공과 자료로 수월하게 진행될 줄 알았던 강의는, 순전히 내 주관적이고 내적인 문제로 다른 국면을 맞이하고 말았다.

글쓰기라는 것이 무엇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에, 영작문을 빙자해 문학이나 이론강의에 자꾸만 욕심을 부리게 되는 나를 발견하게 되면서부터 갈등과 피로누적이 시작된 것이다. 마침 부교재로 선택한 책이 이란혁명과 그 이후를 다룬 자전적 그래픽소설이다보니, ‘탈식민주의’ 나 ‘제국주의’ 등의 용어를 누락시킬 수가 없는 상황이라 관련자료 및 교안작성 등등 이래저래 이전보다 준비를 더 많이 하게 되는 것같다.

물론 스무 명의 학생 중 성실히 나와 눈동자를 마주하며 묻는 말에 대답을 하는 학생은 서너 명에 불과해 아주 신나고 만족스럽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이 1학년 새내기이고 많은 학생이 공학 및 과학전공임을 감안하면, 문학의 효용을 묻는 질문에 대해 ‘유희’ 및 ‘교훈’ 이론을 모두 비스무리하게 이야기하고,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곧잘 ‘설’을 푸는 그 서너 명은 내게 여러 모로 놀랍고 고마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난 학기들과 완전 다르게 한국 국적의 학생이 둘이나 있다 보니, 어떻게든 신경이 쓰이는 것은 확실한 것같다. 평소에도 복잡한 생각이 많기로 유명한 나에게, 처음으로 맞는 한국학생들이 갖는 의미는 결코 간단치가 않으리라. 강의도 강의지만, 강의실 밖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될 경우 사용언어 선택부터 친밀관계를 어느 정도까지 유지해야 할지, 이곳 마인드와 한국식 정서를 얼마나 적절히 배합해 대해야 할지 등등 연관검색어가 좌뇌 우뇌 할 것 없이 매순간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그러고 있다.  한국 그리고 서울은 참 좁은 동네라, 참 별것이 다 신경이 쓰인다.

이란혁명을 다룬 [페르세폴리스(Persepolis)] 강의 준비를 하던 중 어제 우연히 CNN을 통해 이란 대통령의 유엔연설을 들었는데, 다른 걸 다 떠나서 그렇게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 그리고 그의 (분명히 믿을 구석이 있는) 용기가 전부 굉장히 놀라웠다. 그 연설의 정치적 의도와 배경이야 어찌되었든,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서유럽과 미국 측에선 마주하기 힘든 ‘불편한 진실’이었기에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진술은 에드워드 사이드를 위시한 ‘탈근대’이론을 주창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논문과 저서를 통해 실제로 계속 주장해 오고 있는 논점과 질문들이어서 그런지, 오랜만에 만난 참 ‘재밌는’ 연설이라 생각했다.

금요일 오후다. 마음이 제일 가벼운 시간이다. 초반에 몰아둔 발제를 모두 마친 주의 금요일 오후라 더 홀가분한 오후다. 하지만 나의 바디는 무한취침을 요구하며 태업에 돌입한 지 꽤 오래다. 합의 밖에 방법이 없다. 요구를 수용하자. 간만의 초저녁 숙면 모드로 극적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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